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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en eun young jung


비 동시적 연대를 위해

정은영 (전시 <유령>을 위한 소고)


공산주의가 사라질때 공동체적 풍경 또한 사라졌다. 우리는 더이상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목표를 위해 울타리를 치거나 그것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 균질적이고 단호하며 비장하기까지 한 연호를 부끄럽게 여기는 시절이 왔다. 이러한 시절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 가에 대해서 조차 단언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결정론도 본질론도 기능하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애매한 언설이 가장 달콤하고 섹시하게 들릴 것이다. 이것은 결코 풍자가 아니다. 은유는 더더욱 아니다.

이 시대에 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면 과거를 호출하여 향수에 빠지는 일이다. 만약 과거에 관여하고 싶다면 조용히 과거의 출몰을 기다려야 한다. 지나버린 것들은 현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 까지. 이것은 상식이다. 과거엔 상식마저 통제당했지만 이제는 상식이 우후죽순으로 생산된다. 때문에 알아두어야 할 상식이 차고 넘치지만 상식을 의문해서는 안된다. 가장 상식적인 것이 가장 효율적이며 경제적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경제적인 것을 향한 믿음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의문해서는 안된다.

자본과 경제를 향한 의심할 바 없는 신봉은 개별적 주체들로 부터 비롯되지만 놀랍게도 이 개인들의 믿음의 정도는 근소한 편차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동일한 것이어서, 이것은 마치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이라 확신했던 공동체를 닮았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공산주의자들의 집단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이들은 심각한 레드컴플렉스를 가지고 있기때문에 공산주의를 입에 올리는 것 만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폭력성을 띄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사회와 국가와 시대에도 개별적 주체로 통과되지 않는 비체적 개인들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일찌기 이들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이들의 수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이 늘 이들을 멀고 먼 땅에 유배시킨다. '차이의 정치'가 세련된 것임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깊은 내면으로 부터 요동치는 불안의 감정은, 차라리 그들을 모른척하라는 암묵적인 동의를 끌어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애써 그들을 외면할때 우리는 평화시를 유지할 수 있다.

평화는 늘 양심과 윤리로부터 도전받는다. 자본을 획득한 평화시의 우리는 여가를 즐기다가 문득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이 즐거움이 깨어질까봐, 이 안온함이 공격당할까봐 불안하다. 이 평화를 유지해줄 강력한 예방책을 위해 기부하고 싶지만 어쩐지 마음한켠이 석연치 않다. 이것이 바로 양심과 윤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과하게 작동하면 평생을 죄책감에 사로잡혀 지낼 수도 있다. 혹은 이 죄책감을 또다른 무엇으로 승화할 수도 있는데, 그 방법은 널리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의 죄책감을 인지한 자들의 조용한 움직임이 점차 들썩댄다. 집단이 환영받지 못하는 탓에 쪽수로 위협하는 가장 원시적이며 무절제한 응수는 경계해야한다. 그러나 여전히 양적 과시를 그리워하는 이들을 위해 많은 경우 연대의 전략을 선호한다. 개별적 주체들이 상황과 조건에 따라 '따로 또 같이' 뭉치고 흩어지는 연대에의 요구는 느슨하고 우연적인 공동체의 새로운 형태라 말할 수 있겠다.

시간과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아무도 목표하지 않는 것을 위해 연대를 도모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이 믿는 것은 우정이다. 우정이란 아마도 경제적이지 않다. 그러나 평화로울 수는 있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마도 우정을 너무 낭만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정을 믿는다면 극단의 갈등관계를 극복할 만한 쉬크함이 있어야 한다. 감정에 질척거린다면 우정과 환대를 실천 할 수 없다.

과거에 사로잡힌 이들, 효율성의 신봉자들, 자본의 신하들, 먼땅의 유배자들, 시대의 양심들, 무심한 배회자들, 정치적 권력자들, 세련된 글로벌 시민들, 무지한 온정주의자들. 이들의 연대를 상상할 수 있을까? 불확실한 시대, 우정어린 연대는 협상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에게 가능하다. 이들이 협상하기 위해서는 어떤 비 동시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과거와 현재의 사이. 현재와 미래의 사이. 그 사이들의 사이. 시간과 탈시간, 공간과 탈 공간, 계급과 탈계급, 규범과 탈규범, 정치와 탈정치. 이 모든 범주들로 부터 탈주가능한 혼재되고 우발적인 연대를 우리는 비동시적 연대라 부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