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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한국 현대미술 명장면](25) 정은영의 ‘여성국극프로젝트’

ㆍ성별에 관한 사회적 통념과 위계, 그 견고한 틀을 흔들다

미디어아티스트 정은영은 2008년부터 전개한 ‘여성국극프로젝트’를 통해 성적 통념에 의문을 던져 왔다. 남성 역할을 맡은 젊은 국극 여성배우들이 반복적 훈련으로 남성성을 수행하면서 서서히 남 성으로 되어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담아낸 그의 작품은 성별에 부여된 규범을 와해시키는 한편 이전 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던 젠더 문제를 고찰할 수 있는 담론을 생성해 왔다. 그리고 그 담론을 ‘뜻밖 의 응답’(2009), ‘무영탑’(2010), ‘오프/스테이지’(2012) 등으로 연장시켰다. 화장을 할수록 여자가 남자로 변하는 과정을 담은 ‘분장의 시간’(2009)을 비롯해 국극을 연극 무대로 옮긴 ‘마스터클래 스’(2010)도 그 일부다.

이 모든 작업은 남성중심주의와 여성에 대한 폭력에 저항했던 여성국극 탄생의 의미를 되돌아보고, 남성의 입장에서 논의돼온 전통적 성별 체계와 위계 속에서 남역 전문 여성배우들의 창극을 기반으 로 남녀의 역할 차이와 습속화된 구조를 되묻는 작업이었다.

‘그 여자의 두통약’(2006), ‘꽃놀이’(2006), ‘천식’(2006), ‘간밤의 여행자’(2007)와 같이 여성의 존 재성과 비극적 서사, 성을 규정하는 관념에 대한 저항을 적시한 2000년대 초반 작업들은 주로 개인 의 경험을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하는 소극적 방식의 비판적 미학을 견지했다. 이에 비해 2000년 후 반 본격화된 ‘여성국극프로젝트’는 6여년에 걸친 조사와 연구, 당사자와의 지속적인 접촉, 인터뷰, 워크숍 등으로 이뤄진 작업이다. 작가라는 개인 주체를 부단히 타자의 영토로 이동시키고 그 관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사고, 성찰과 개념 형성 등을 작업에 개입시켰다.

그런데 철저히 사적 영역에서 이뤄지던 작업 내용이나 형식이 1950년대의 영광을 뒤로 한 채 현재 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되는 여성국극으로 전이된 결정적 계기는 2007년부터 2년간 진행된 ‘동두천 프로젝트’였다. 작가는 ‘기지촌’이라는 오명을 가진 동두천에서 군대와 영토, 자본의 모순적 혼용을 바탕으로 반복되는 여성재현 방식에 주목했고 집단 규범 내의 여성을 상황적, 맥락적으로 분석했 다.

동두천이라는 거대한 미 군사지구의 이주노동자이자 성노동자로서의 여성을 대면한다는 것, 그것 도 단지 일회적 만남이 아니라 작가로서 적극적 개입과 해석을 덧붙여야 한다는 것은 비단 다큐멘 터리에 그치지 않는 부단한 성찰과 고민을 요구했다. 또 타인과 연대하며 그 결과를 어떻게 작품으 로 수용할 수 있는지 학습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덕분에 ‘여성국극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진행하는 데 필요한 믿음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정은영의 영상작업은 보다 유의미한 지점에 서게 된다. 창극의 한 갈래로서 여 성국극을 재발견함은 물론, 그 성과물인 ‘여성국극프로젝트’로 성의 단일성, 내적 일관성이란 개념 이 권력체계를 강화하는 규제적 허구임을 밝혀냈다. 동시에 사적 개인들의 정동이 무엇을 수행하는 지, 또 그 수행이 어떻게 개인의 욕망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의 사건과 역사가 되는지 제시할 수 있 었다. 이는 ‘정동의 막’(2013)에서처럼 지배 권력을 지탱하는 물화된 젠더 개념에 예술적 시선을 더 함으로써 성이라는 경계를 되묻는 푸코식 사유로 확장되고 있다.

<홍경한 | 미술평론가·월간 경향아티클 편집장>

경향신문, 2014년 2월 24일